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인 동맹 (문단 편집) === 대공국 === * 베르크 대공국 * 창설 회원국{{{-2 (1806년 7월 12일)}}} * 의무 제공 병력: 5,000명 * 유일하게 선제후 지위와 관계없이 형성된 대공 지위로, 프랑스 대공(Prince français)이었던 [[조아킴 뮈라]]가 군주 지위를 원했기에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프랑스 제국의 관할이 된 베르크 공국·클레브 공국·뮌스터 후국 등을 합쳐서 형성했다. 베르크 대공국의 주권은 실질적으로 프랑스 제국이 행사했으며, 1807년에 프랑스가 프로이센에게서 취득한 영토 일부를 취득했다. 베르크-클레브 대공을 자처하던 뮈라는 이런 허울 뿐인 군주 지위에 만족하지 못하여 스페인 국왕이 되려는 공작을 펼쳤고, 결국 1808년에 나폴레옹이 뮈라를 나폴리 왕으로 보내면서 베르크 대공 작위를 회수했다가, 1809년에 조카인 루이나폴레옹을 베르크 대공으로 책봉했다. 이후 1810년에 아렌베르크 공국을 합병하였으나, 나폴레옹이 북해 연안 일대를 프랑스 제국으로 합병하면서 영토가 축소되었으며,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해체되어 프로이센 왕국과 나사우 공국에 분할 합병되었다. * 레겐스부르크 선제후국 → 프랑크푸르트 대공국 * 창설 회원국{{{-2 (1806년 7월 12일)}}} * 의무 제공 병력: 968명 * 1803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수석 선제후인 마인츠 대주교는 레겐스부르크 대주교로 대체되었고, 이에 따라 마인츠 선제후 카를 테오도르 폰 달베르크는 레겐스부르크 대주교로 옮겨 제국재상 및 수석 선제후 지위를 그대로 승계했다.[* 참고로 교황이 교구 변동을 정식 승인한 것은 1805년 2월 1일이다. 달베르크는 원래 콘스탄츠 주교후였는데, 나폴레옹의 독일 침공을 지지하여 1802년에 마인츠 선제후가 되었고, 이후 레겐스부르크 대주교로 옮겨 최종적으로 프랑크푸르트 대공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나폴레옹에게 기대를 걸었던 독일인들이 대체로 그랬듯이(...) 나폴레옹의 행보에 실망하여 점차 소원해졌고, 1812년 무렵부터는 대놓고 프랑스에 반기를 들었다. 1813년 9월에는 피난을 명목으로 아예 거처를 스위스로 옮겼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 독일로 돌아왔다. 1817년에 선종할 때까지 레겐스부르크 대주교직을 유지했으며, 달베르크 사후 레겐스부르크 주교로 환원되었다.] 프랑스에 넘어간 라인강 서안의 마인츠 대주교령에 대한 보상으로 기존 레겐스부르크 주교후령과 주변의 몇몇 수도원령이 세속화되어 레겐스부르크 자유도시와 함께 '레겐스부르크 후국'으로 통합되었으며, 라인강 동안의 기존 마인츠 대주교후령 일부도 세속화되어 '아샤펜부르크 후국'으로 재구성되었는데, 두 후국은 레겐스부르크 선제후의 세속 영지가 되었다. 라인 동맹에서 수석 선제후 지위는 '수석군주(Fürstprimas)'로 대체되었고, 추가로 프랑크푸르트·베츨라어 자유도시를 수여받았다. 하지만 바이에른은 자국 영내에 위치한 레겐스부르크 후국의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당연히 레겐스부르크 선제후국의 대공국 전환도 반대했다. 결국 1810년에 나폴레옹은 바이에른의 주장을 수용하는 대신 아샤펜부르크 후국 주변의 하나우 후작령과 풀다 후작령을 보상으로 할양했고, 2월 16일에 달베르크의 영지들을 통합해 프랑크푸르트 대공국을 구성했으며, 달베르크가 선종하면 수석군주 및 프랑크푸르트 대공은 나폴레옹의 의붓아들인 외젠이 계승하도록 설정했다. 달베르크는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세속 지위를 포기했고, 외젠은 명목상 라인 동맹의 수석군주 및 프랑크푸르트 대공 지위를 승계했지만, 대공국은 12월에 연합군에 점령되면서 해체당했다. [[빈 체제]]에서 레겐스부르크 후국은 바이에른 왕국의 영토로 유지되었고, 프랑크푸르트는 자유도시로 회복되었지만, 베츨라어는 프로이센에 합병되었다. * [[바덴 대공국]] * 창설 회원국{{{-2 (1806년 7월 12일)}}} * 의무 제공 병력: 8,000명 * 나폴레옹에 의해 1803년에 선제후로 승격했고, 라인 동맹에서 대공이 되었다. 바이에른 왕국에 이은 [[나폴레옹 전쟁]] 수혜국으로, 1803년부터 1810년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영토를 확장하여 변경백국 시절에 비해 8배 가까이 늘어났는데, [[빈 체제]]에서도 그대로 승인되었다. * [[헤센 대공국]] * 창설 회원국{{{-2 (1806년 7월 12일)}}} * 의무 제공 병력: 4,000명 * 원래 헤센-다름슈타트 방백국으로, 라인 동맹에 합류하지 않은 헤센 가문의 종가인 헤센-카셀 선제후 대신 대공으로 승격되었고, 분파인 헤센-홈부르크 방백국을 합병했다. [[빈 체제]]에서 헤센-홈부르크가 복구되었으나, 라인강 서안의 마인츠 일대를 보상으로 받으면서 영토는 오히려 늘어났다. 복구된 헤센-홈부르크 방백국은 후국(Fürstentum)과 동격인 독립적인 주권국가 지위를 얻긴 했으나 종가인 헤센-다름슈타트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고, 1866년에 가문의 단절로 인한 상속으로 헤센 대공국에 통합되었으나, 같은 해 헤센 대공국 북부가 [[북독일 연방]]에 가입당하면서 기존 방백국 영토는 프로이센 왕국에 합병되었다. * 뷔르츠부르크 대공국 * 1806년 9월 23일 가입 * 의무 제공 병력: 2,000명 * 대공 [[페르디난도 3세|페르디난도]]는 원래 [[토스카나 대공국|토스카나 대공]]이었으며 [[프랑스 혁명]]에 유화적인 인물이었다. 수도 피렌체에 공화정부가 들어서면서 오스트리아로 도피했고 1801년에 대공국을 포기할 것을 강요당했는데, 그 보상으로 1803년에 잘츠부르크 선제후가 되었지만, 1805년에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잘츠부르크 공국은 오스트리아에 합병되고 대신 뷔르츠부르크를 받으면서 프랑스 제국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세속화된 뷔르츠부르크 공국은 바이에른의 영토였는데, 이를 제공하는 대가로 오스트리아의 [[티롤 후백국]]을 얻었다. 페르디난도는 라인 동맹 창설 과정부터 관여하여 바덴 선제후와 함께 나폴레옹에게 선제후 작위를 대공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지만, 합스부르크 가문 소속으로 프란츠 2세의 동생이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에는 동참하지 않았기에 정식 가입이 늦춰졌다.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시점부터 대공국으로 전환했다. [[빈 체제]]에서 토스카나 대공으로 복귀하면서, 뷔르츠부르크는 바이에른 왕국에 환원되고 티롤도 오스트리아에 환원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